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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김교신, 그치지 않는 그 삶의 향기_한동대학교 교수 류대영

관리자 | 2011.11.22 11:22 | 조회 7097

교사 김교신, 그치지 않는 그 삶의 향기

 

류 대영
(한동대학교)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별다른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말이지만, 우리 나라 역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본받을 만 한 어른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은 분야를 불문하고 한민족 공동체 전체에 대개 적용되는 일인 듯 하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도 개신교만 따지더라도 120여 년이나 되었다. 기독교는 이제 젊은 종교가 아니며 낯선 종교도 아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가르침을 받고 제대로 실천하여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린 분들이 많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120년이라는 한국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이분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한국의 역사 속에 제대로 실천한 분이라고 세계에 내세울 수 있고, 또 한국 기독교인 모두가 흠모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 그런 분 다섯을 꼽으라고 한다면, 네 분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된다. 김교신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만 선택하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다르듯이, 과연 어떤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주어진 역사적 환경 속에서 특정하고 유한한 삶을 살기 마련이다. 누구도 역사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1세기 초엽, 로마제국 치하의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역 민중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고치고, 위로하는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삶이 보편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역사적 환경과 유리된 말씀과 사역을 하지 않고, 매일 만나게 되는 “이웃”들을 상대로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구체적인 사랑을 베푼 데 있을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위대한 영혼들은 예외 없이 당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 요구되는 기독교적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한 분들이었다
.

한국 기독교 공동체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큰바위 얼굴”이 될만한 분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후 한민족이 지나온 역사가 그만큼 파란만장했으며, 그런 역사적 상황이 요구하는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을 반증한다. 1901년에 태어나 해방을 서너 달 남긴 시점에 돌아가신 김교신 선생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를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흠모하며 본받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가 그런 역사적 환경 속에서 가장 진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친구요 동지인 함석헌 선생은 해방 후 자신이 속한 무교회 모임을 설명하는 가운데 김교신이 “무엇으로 보나 으뜸”이었으며 살아있었더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힘차게 하는 것”이 있었을 터라면서 아쉬워했다. 비록 사십대 중반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선생이 그때까지 보여준 인격이나 삶의 태도로 볼 때 그가 해방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히 거기에 합당한 탁월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또 다른 한 걸출한 인물의 평가인 것이다. 한 인간의 유한한 삶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항구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

김교신 선생은 오랜 세월을 이 땅에서 살지 않았다. 요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천수를 다 누렸다고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갔다. 따라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살면서 많은 활동을 한 인물과는 달리 그는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지 못했다. 선생의 삶 가운데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을 빼고 “공생애”만 추려서 말한다면 크게 두 가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가운데 더 잘 알려진 것은 그가 함석헌, 송두용 등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동지 여섯 명과 같이 《성서조선》을 발행한 일이다. 1927 7월부터 발간하기 시작하여 1942 3월 김교신 선생이 쓴 권두언 “조와(
弔蛙)”가 발단이 되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발행된 《성서조선》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성서조선》이 처음에는 여섯 명의 동인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곧 김교신 선생이 주필이 되어 사실상 그의 책임편집 아래 계속 발행되었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진 대로이다. 《성서조선》은 희망을 잃어버린 식민지 조선을 성경 위에서 되살리자는 성경중심주의, 그리고 성경을 식민지 조선이라는 고통스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해석한다는 기독교민족주의가 결합된, 깊은 믿음과 결연한 민족애의 표현이었다.

도탄에 빠진 민족에 대한 사랑과 성경(특히 성경이 보여주는 십자가)만이 생명을 주는 힘이라는 믿음은 기독교인으로서 김교신 선생이 가졌던 인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 인격은 교사로서의 삶을 통해 가장 완전하게 구현되었다. 선생이 언제 교사가 되기로 작정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함흥농업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아 교사가 되는 일이 처음부터 그의 목표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기 진전에 경험한 삼일운동, 일본에 가서 받아들이게 된 기독교, 우치무라 선생을 통해 알게된 기독교 민족주의 등은 그가 농업학을 계속 공부하지 않고 사범학교로 진학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김교신 선생은 삼일운동을 경험하고 일본으로 온 시점부터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인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을 겪으면서 식민지의 젊은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후의 삶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이때 선생은 성경을 공부하며 가르치고 민족애를 가르치는 데 헌신하기로, 또 교사로서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음이 분명하다
.

동경고등사범학교 영어과로 입학한 김교신 선생은 일 년 후 지리박물과로 전과했다. 처음에 영어과를 택했던 것은 일본에 와서 진학을 준비하며 다녔던 세이쇼쿠 영어학교의 영향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런데 지리박물과는 동식물학, 광물학, 지질학, 지리학 등을 포괄하는 넓은 전공이었다. 그가 지리학을 택한 것은 함흥농업학교에서 농업학을 공부했던 것과도 연결되어 보인다. 조선의 “땅”을 무척 사랑했던 그는 거처하는 곳 주위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농사 짓는 일을 평생 동안 계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에는 조선 땅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땅”을 빼앗긴 민족의 교사로서 선생은 국토를 사랑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자연스럽게 민족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

김교신 선생은 1927년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즉시 귀국하여 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처음에 부임한 고향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부터 십 년을 봉직한 양정고등보통학교, 잠시 있었던 제일고등보통학교, 개성고등보통학교에 이르기까지 약 15년 동안 교단에 섰다. 그가 교단을 영영 떠나게 된 것은 1942 3월 “성서조선 사건”의 주모자로 투옥되어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면서였고, 석방된 후 2년만에 사망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공생애” 전체가 교사로서의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생의 교사생활을 살펴보면 지금도 기독교 교사가 본보기로 삼아야 될 아름다운 가르침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

무엇보다 김교신 선생은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교사였다. 이에 얽힌 일화는 너무도 많아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지경이다. 선생은 학생들이 나쁜 짓을 했을 때에 회초리를 아끼지 않는 엄한 교사였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의 불행 앞에,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한 학생의 장래를 걱정하며, 또 약하고 힘없는 자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깊은 사랑의 스승이었다. 양정에서 근무할 때는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를 자기 집에 거두어 같이 생활했다. 그는 학생들을 “땅에서 솟아난 옥”이나 “하늘에서 떨어진 샛별”로 여겼으며, 그런 보석들을 갈고 닦는 교육을 “큰 예술적인 공사”로 여긴 교사였다. 학생들은 선생이 마라톤 시합에 출전하여 제자들과 같이 뛰고, 심지어 교내 씨름 대회에도 출전하여 학생들과 같이 겨루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교사로서의 김교신 선생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범은 가르치는 것 그 차체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평생을 “평교사”로 살았으며 교단에서 학생을 대하고 학생들과 동거동락 하는 삶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 동경고등사범이라는 당시 최고의 교사 양성기관을 나왔고, 또 유능하고 존경받는 교사로 명성이 났기 때문에 자신이 원했더라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사범학교 동기들이 모두 장학관이나 교장이 되고 후배들도 대개 교무주임이 되었을 때, 그는 시종일관 평교사로 남아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때 선생은 “말석 평교원은 교사 노릇하는 나의 평생의 소원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

교사 김교신이 보여주는 또 다른 배울거리는 그가 자신의 전공에 대한 애정과 탁월성을 삶과 민족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박물
지리 교사였는데, 제자들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전공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열심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한다. 양정에서 근무할 때 선생은 별관에 위치한 박물실을 연구실로 삼아 수업이 없을 때에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을 하였다. 한 제자는 선생이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들과 어울려 잡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선생의 수업은 전공을 통해, 비유로, 혹은 예화를 사용하여 인생의 교훈을 가르치고 민족과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 그의 가르침은 정열적이어서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감동적인 것이 조금도 싫증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양정에 봉직할 때 “물에 산에”라는 모임을 만들어 학생들과 같이 등산하고 유적도 답사하며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는데,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등산화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 그는 5만 분의 1로 축소된 한국 지도를 학생들에게 부분으로 나누어주고 지형지물에 따라 채색을 하여 입체적인 한반도 지도를 완성하는 작업을 시켰다. 그에게 배우는 1학년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는데, 이 작업은 매우 진지하고 엄격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별 설명 없이 과제를 나누어주되, 성의 없이 하는 학생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국토를 빼앗긴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이 주고자 했던 교훈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교신 선생이 보여준 모범 가운데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철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양칼(면도칼)”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명하고 확실한 분이었다. 선생으로부터 배운 후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제자는 매우 많은데, 그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그가 언행일치의 삶을 살면서 학생들에게 엄격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에게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그날 그날의 교육적 반성을 꼬박 꼬박 일기로 적었다. 30리 길을 시계처럼 정확하게 자전거로 통근하는 모습, 칼 찬 일본 군인이 칼을 뽑고 위협하는 앞에서 계속 한국어 이름을 부르는 당당함, 정몽주의 초상화를 교실 정면에 걸어놓고 가르친 높은 지조와 애국심, 그리고 민족의 먼 앞날에 대한 걱정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듯한 드높은 기상은 깊은 자기성찰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가 과외로 학생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기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학생들은 김교신 선생의 인격과 만나면서 그를 외경하게 되었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되면서 선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체현(
體現)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학교 언덕길을 오르던 스승을 보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진 성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 인간의 삶은 그의 삶이 피운 꽃과 맺은 열매에 의해 평가되기 마련이다. 훌륭한 삶은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 꽃이 얼마나 향기로울 수 있는가는 생각이나 믿음보다는 인격과 행동에 달려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했느냐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고 가르치신 사랑을 어떻게, 얼마나 베풀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김교신 선생은 평교사로서의 삶을 통해 일제하의 역사가 그에게 요구했던 바를 통찰하며 그리스도의 인격을 꽃피우고 열매 맺었다.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체현했던 그리스도의 인격은 비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가 피웠던 꽃은 아직도 향기를 발하여, 시대적 소명을 생각하며 교단에 서는 모든 기독교인 선생들에게 한 전형(
典型)으로 전해지고 있다.

《좋은교사》 (2003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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